한국 재계의 거목 '하늘나라로'…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종합)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5개월만이다.
삼성은 이날 이건희 회장의 사망 소식을 알리며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고인은 2014년 5월 10일 밤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켜 병원에서 심폐소생술(CPR)까지 받고 소생해 치료를 이어왔다.
이후 자가호흡을 하며 재활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은 선친인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건희 회장은 경남 의령 친가로 보내져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녔고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부친의 엄명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린시절 영화 감상과 애완견 기르기 등에 심취했고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사대부고 재학시절에는 레슬링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 중이던 홍라희 여사와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70년대 이 회장은 미국 실리콘밸리를 누비며 하이테크 산업 진출을 모색했고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삼성의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맡아 유공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쓰라린 실패를 맛본 이 회장은 삼성 경영권을 승계하기까지 2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호암의 눈밖에 나면서 이 회장이 후계자로 낙점됐다.
1982년에는 양재대로에서 덤프트럭과 교통사고가 나 아찔한 순간을 넘기기도 했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 별세 이후 그룹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1993년 신경영선언을 통해 초일류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이 회장은 삼성가 분할이 거의 완료된 뒤 삼성전자 임원들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작심발언으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경영, 질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대도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회장은 남다른 집념으로 삼성을 키웠다. 1987년 1조원이던 시가총액을 2012년 390조원대로 40배나 성장시켰고 총자산 500조원의 외형을 만들었다.
2006년 글로벌 TV시장에서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애플을 따라잡고 스마트폰시장 1위를 달성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포함해 20여개 품목의 글로벌 1위를 일궈냈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각종 수사로 홍역도 치렀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특검팀에 의해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되자 2008년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발표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된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했고 조직 재정비와 삼성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헌신했다. 삼성전자가 카피캣의 오명을 씌운 애플을 추월하는 데도 고인의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sms@yna.co.kr
각종 제품 개발 때 직접 아이디어 내
불량세탁기 조립 사건…'신경영' 선언 계기
무선전화 15만대 '눈물의 화형식'…휴대전화 신화 밑거름

이건희 회장 취임식
(서울=연합뉴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사진은 1987년 회장 취임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2020.10.25 [삼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빠르고 과감한 판단과 장기적 안목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통념을 깬 역발상은 오늘날 삼성이 있게 한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역발상이 만들어낸 반도체 신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83년. 지식과 경험이 전혀 없던 삼성이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중요한 결정이 계기가 됐다.
1987년 4메가 D램 개발 경쟁이 붙었을 때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개발 방식을 스택(stack)으로 할지, 트렌치(trench) 방식으로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스택은 회로를 고층으로 쌓아 올리는 방식이고, 트렌치는 밑으로 파 내려가는 방식으로, 개발진 사이에서도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할지 의견이 양 갈래로 나뉘었다.
당시 회의에서 전문경영인들이 처음 시도하는 기술인 스택 공법을 도입하는데 주저하자,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이 회장의 결정은 대성공으로 이어졌고, 당시 트렌치 방식을 택했던 경쟁업체는 스택 방식을 취한 삼성전자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어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하면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1위에 오른다.
엔지니어 감각을 지닌 이 회장은 이후 각종 제품 개발에서도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모토로라가 처음 휴대전화를 내놓은 이후 그때까지 휴대전화의 통화(SEND)와 종료(END) 버튼은 일괄적으로 숫자키 아래에 있었다.
삼성 역시 처음 개발한 휴대전화는 이런 관행을 따라 제작됐다. 그러나 이 회장은 제품을 살펴보다 삼성전자 경영진에게 이같이 지시한다.
"가장 많이 쓰는 키가 통화와 종료 키인데, 이게 아래쪽에 있으면 한 손으로 전화를 받거나 끊기가 불편하다. 두 키를 위로 올리는 것이 좋겠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지시였다. 이후 통화와 종료 키가 위로 올라간 삼성 휴대전화가 출시됐고, 이른바 '이건희 폰'은 소비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회장 취임사 하는 이건희
(서울=연합뉴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사진은 1987년 회장 취임식에서 취임사 하는 이건희 회장. 2020.10.25 [삼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불량세탁기 조립 사건…'신경영' 선언 계기1993년 6월 초,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이건희 회장 앞으로 삼성 사내방송팀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전달된다.
당시 비디오테이프에는 세탁기 생산라인 직원들이 세탁기 뚜껑 규격이 맞지 않자 칼로 뚜껑을 깎아내 본체에 붙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뚜껑 부분을 다시 설계하고 생산해야 했지만, 직원들이 별생각 없이 플라스틱을 깎고 불량품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뒤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 회장은 서울로 전화를 걸어 지시한다.
"내가 질 경영을 그렇게 강조했는데도 이게 그 결과입니까? 나는 지금껏 속아 왔습니다. 사장들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세요."
독일행 비행기를 타기 전 일본 도쿄에서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부서를 지도했던 일본인 후쿠다 다미오씨로부터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담은 보고서를 받은 것도 이 회장을 자극했다.
"삼성은 상품기획이 약하다. 개발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장에 물건을 내놓는 타이밍도 놓치고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 회장의 '소집령'이 떨어진 후 일주일 뒤 삼성전자 사장단과 임원,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였다.
그해 6월 7일, 이 회장은 양이 아닌 질(質) 경영을 위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는 말로 질책하며 '신경영' 선언,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하게 된다.
이제까지 지속했던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 고리를 끊고 질을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의 경영구조를 실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영양실조에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였다"고 진단했다.
이 회장의 주요 경영철학인 '메기론'도 이때 나왔다. 미꾸라지를 키우는 논에 천적인 메기를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생존을 위해 더 많이 먹고 더 열심히 움직여 힘도 세지고 날렵해진다는 것이다. 외부 인재를 투입해 내부 경쟁을 유발하겠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방호복 입은 이건희 회장
(서울=연합뉴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 만이다. 사진은 2004년 반도체 설비를 방문해 방호복을 입고 있는 이건희 회장. 2020.10.25 [삼성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무선전화 15만대 '눈물의 화형식'…휴대전화 신화 밑거름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1994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제품 출시를 무리하게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불량은 암"이라며 질타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량품이 나오자 소비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직접 지시를 내린다. "무선전화기 품질 사고 후 현재까지의 실천 경과와 향후 계획을 보고하고, 전 신문에 과거 불량 제품을 교환해주겠다는 광고를 게재해야 한다"
이후 삼성은 신문에 대대적인 광고를 실은 뒤 불량 제품을 교환해줬고, 1995년 3월 9일 특단의 조처를 한다.
시중에 판매된 무선전화 15만 대를 전량 회수해 삼성전자 구미공장 운동장에 쌓았고, 임직원 2천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몇 명의 직원들이 전화기 더미를 내리쳐 산산조각을 낸 뒤 불구덩이에 넣은 것이다.
당시 잿더미로 변한 무선전화는 150억 원어치의 분량이었다. 엄청난 충격요법이었던 이 사건은 '애니콜'과 '갤럭시'로 이어지는 삼성전자 휴대전화 신화의 밑거름이 된 일화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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